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힐데가르트 폰 빙엔 (문단 편집) == 업적 == || [youtube(v6qFCYRQKVA)] || [youtube(Ei88J4lERbk)] || || [[파일:attachment/410px-Hildegard.jpg|width=300]] || || 힐데가르트가 [[성령]]을 받아 책을 저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. 힐데가르트의 저서 《Liber Scivias(길을 알라)》의 삽화이다. || 힐데가르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[[음악]] 부문이다. 작곡가와 작곡한 음악이 현재까지 온전하게 내려오는 인물 중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.[* 예를 들어 우리는 [[우륵]]이 뛰어난 음악가라는 걸 알지만, 그가 작곡한 악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. 또 서기 1세기경 제작된 [[세이킬로스의 비문]]은 현존하는 온전한 악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, 그걸 정말 세이킬로스가 작곡했는지는 알 수 없다. 이외에도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Oxyrhynchus_hymn|옥시링쿠스 찬가]]를 비롯하여 현전하는 서기 3~4세기에 작곡된 이른 시기의 찬송가들도 모두 작곡가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실정이다. 세이킬로스의 비문보다 앞선 기원전 2세기에 작곡된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Delphic_Hymns|아폴론 찬가]]는 작곡가까지 명확하게 남아있지만, 이 경우에는 악보가 온전하게 전하지 않아 순위에 들지 못했다.] 그녀는 현대 역사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잘 알려진 단성음악 작곡가들 중 한 명이다. 또 힐데가르트가 작곡한 전례극 《미덕의 질서》(Ordo Virtutum)는 '''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덕극'''[* 원시적인 연극의 한 형태.]'''이자 [[오페라]]의 기원'''[* 그러나 이를 최초의 [[오페라]]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. 오페라의 기원은 [[르네상스]] 시대 [[이탈리아]] [[피렌체]]의 귀족 바르디 백작의 후원을 받던 예술가 모임 '카메라타'의, [[고대 그리스]] 희곡을 재현하자는 열망으로 인해 말들어진 '다프네'가 최초이다.]으로 일컬어진다. 또한 [[성가]]도 다수 작곡했는데, 《천상의 계시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교향악》(Symphonia armoniae celestium revelationum)이라는 제목의 성가집으로 묶인 이 성가들은 다양한 범주로 세분할 수 있으며 힐데가르트 자신의 쓴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다. 단 하나의 선율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[[중세 음악]] 초기의 단선율적인 성격(즉 모노포니)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. 당시 주류와는 꽤 벗어난 작품들이었으나 근래에는 음반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당시에도 유명했고 또 지금까지도 들려지고 있다. 그 외 부분에 남긴 업적도 실로 굉장한데, 우선 신학서와 의학서, 식물학서 등을 저술하였다. 힐데가르트가 쓴 신학서는 최근 굉장히 주목받는 생태신학의 원조로 불리고, 의학서는 이후 서양 의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, 특히 약초학과 [[보석]] 치료 같은 부분은 지금까지도 연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. 물론 현재는 주류의학이 아닌 대체의학 같은 곳에서 주로 연구된다. 하지만 근 천 년 전 의술을 지금까지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다. 책 저술 과정도 굉장히 비범한 것이, [[라틴어]]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'''직접 라틴어와 [[독일어]]를 결합한 언어를 만들어 썼다.''' [[언어학]]에 굉장히 정통하지 않다면 학문을 저술하는 데 통용 가능한 수준의 언어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, 힐데가르트가 뛰어난 언어학자로 분류되는 이유. 물론 오늘날 말하는 이론언어학과는 거리가 있지만, 이론언어학이란 것 자체가 19세기에야 정립된 학문이니. 또한 직접 그린 각종 삽화도 평가가 높다. [[미술사]]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, 자신의 내용과 사상을 그림으로 잘 표현해 낸, 한 마디로 좋은 삽화가였다. 물론 이 정도 일도 당시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었다. 힐데가르트가 저술한 책의 삽화는 직접 그렸다는 설도 있지만, 일종의 감독으로서 이렇게 저렇게 그릴 것을 세세히 주문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. 혹은 둘 다라는 설도 있는 듯. [[예언자]]이자 상담가로서도 활동하였는데, 이런 신비주의적 면모를 현대에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어려우나 최소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. 게다가 '''[[황제]]'''와 '''교황'''을 포함한 당대 [[유럽]]의 명사들이 힐데가르트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 이야기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. 또 힐데가르트는 '''최초의 독립된 [[수녀원]]을 세운 인물'''이다. 이전까지의 수녀원은 전부 남성 수도원에 종속된 형태로만 존재했지만,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최초의 여성들만을 위한 독립된 수녀원을 건설했다. 이 점 때문에 크리스트교 계열 [[페미니스트]]에게도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. 힐데가르트가 2번째로 지은 수녀원은 아이빙엔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, 이때부터 힐데가르트는 '힐데가르트 폰 빙엔', 즉 '빙엔의 힐데가르트'로 불리기 시작했다. 즉 힐데가르트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, 사상가, 음악가, 작가, 의학자, 식물학자, 언어학자, 예언가 및 기타 등등이었다. 거기에다 저 대부분의 분야에서 당대에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. 저 중 한 분야에만 업적을 남겼어도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. 그런데 힐데가르트는 저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. 한마디로 '''상식을 뛰어넘는 [[우주괴수]]'''였던 것이다. 이러한 비범성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'여성판 [[레오나르도 다 빈치]]'라고 추앙받을 정도이다. 더욱 놀라운 진실은 다 빈치보다도 힐데가르트 쪽이 '''350년 가량이나 빨리 태어난 인물'''이라는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